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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4권 제1장 서해훼리호 참사 9주기 위령제 ②

기사승인 2019.07.09  18: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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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훼리호 참사 9주기 위령제 ②

김병갑은 광산 김씨다. 아버지 김문하는 1970년대 중반 사망했다. 어머니는 지아비 사망 후 몇 년 뒤 이승을 떠났다.

김문하는 선주였다. 김문하네 고깃배는 규모가 컸다. 멀리 동중국해까지 나가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중선배도 운영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큰 고깃배를 운영한 김문하는 부자였다. 대리의 바닷가 중앙에 위치한 김문하네 마당과 텃밭을 포함한 집터는 마을에서 가장 넓었다.

몸집도 크고, 눈도 컸던 김문하는 마을의 유지였다. 크고 작은 마을일에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 치러지는 마을 동제인 위도띠뱃놀이 행사에도 깊이 관여했다.

김문하는 마을 최고의 상쇠였다. 그가 쳤던 꽹과리 가락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82-3호인 위도띠뱃놀이의 인간문화재인 이인당에게 전수돼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1960년대 어느 해, 김문하네 집엔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당대 최고의 민속학자인 임석재 교수였다. 서울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임석재 교수가 김문하를 찾아온 것은 대리의 동제이자 풍어제인 위도띠뱃놀이를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임석재 교수는 위도띠뱃놀이의 가치를 우리나라 민속학계에 널리 알렸다. 원당제 또는 원당굿 등으로 불리던 위도띠뱃놀이가 1978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기까지 임석재 교수의 공로가 컸다.

김문하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맏이는 장남 김병남이다. 교사인 김병남은 대리국민학교 교가를 작사한 바 있다.

‘칠산바다 넘나드는 우람한 푸른 꿈을/성난 파도 달래면서 곱게곱게 키우리/서로 돕고 부지런히 슬기를 닦아/내 나라의 기둥되리 대리 대리 어린이’

이런 대리국민학교 교가도 작사한 바 있는 김병남은 위도띠뱃놀이가 1978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쥐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대리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김병남은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는 마을 주민들을 지도했다. 교편을 잡고 있던 대리국민학교의 비좁은 운동장에서 주로 진행된 굿과 놀이의 연습을 지도하는 교수를 맡았다.

김병갑은 김문하의 넷째다. 위엔 세 명의 형이 있고, 아래엔 한 명의 여동생이 있다.

김병갑은 전주에 있는 Y고등학교를 1968년 졸업했다. J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해는 1977년이다. 대학 졸업 후, J중학교와 Y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김병갑이 부안인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 시작한 해는 1992년이었다. 서해훼리호 참사가 발생하기 한 해 전인 그해 3월에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다.

제14대 총선 때, 부안에서는 두 명의 후보가 정치적 운명을 걸고 맞붙었다. 민주당의 현역 국회의원인 이희복 후보와 민주자유당 고명동 후보였다. 승자는 이희복 후보였다.

민주자유당 고명동 후보는 육군사관학교 15기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과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4성 장군 출신이다. 김병갑은 고명동 후보의 선거캠프를 총지휘했다.

김병갑이 고명동과 인연을 맺게 된 데는 큰형 김병남의 도움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부안군 보안면 출신인 고명동은 전주사범학교 졸업 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부안의 모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바 있는 김병남도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김병남과 고명동은 전주사범학교에서 학연을 맺었다. 세월이 흘러 부안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고명동에게 김병남은 동생 김병갑을 소개했던 모양이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고명동은 낙선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김병갑은 부안 정치판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1998년, 김병갑은 부안군수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그 뒤 김병갑은 승용차에 고무장화와 사탕을 싣고 다녔다. 부안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군민들을 만났다. 논이고 밭이고 갯벌이고 가리지 않고 장화를 신고 들어갔다. 군민들의 어려움과 희망사항 등을 듣고 나서 정치인이 거들어야 될 일을 논의했다. 헤어질 때는 군민들의 손에 사탕을 쥐어주었다.

지난 6월에 실시된 지방선거 때, 김병갑은 부안군수에 다시 도전했다. 당적도 없는 무소속이었다. 민주당의 텃밭인 부안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집권 여당의 현직군수를 2,000여 표 차로 따돌리고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김병갑에겐 ‘사탕군수’라는 애칭이 붙었다.

사탕군수 김병갑은 부안군수에 당선된 뒤, 군청 군수실 출입문을 모두 투명한 유리문으로 개조했다. 언론은 ‘투명행정에 앞장서는 개혁적인 성향의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민선 3기 부안군수인 김병갑의 올해 나이는 52세다. 불혹의 나이였던 48세에 부안군수에 도전해 실패한 바 있다. 4년간 손에 사탕을 들고 산과 들, 그리고 바다를 누비는 노력 끝에 부안군수에 당선됐다. 그 뒤, 사탕군수 김병갑의 이름 석자는 전국 각지에 널리 알려졌다.

“사탕군순지 오다마군순지 낼 위도에 안 온다고 허던디 언니, 뱅갑이 아자씨 헌티 무신 볼일이 있어서 그러능가?”

부안군수 김병갑의 서해훼리호 9주기 위령제 참석유무를 물은 여수댁의 질문에 대한 조경신의 답변이다. 조경신은 부탄가스를 연료로 쓰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사이에 두고 여수댁과 마주 앉아 전을 부치고 있다. 딴치도리 출신인 40대 후반의 조경신은 서해훼리호 참사 때 친고모를 잃었다.

“똥 누러 칙깐에 갈 때허고 똥 누고 칙깐서 나와서 허는 행실이 눈꼽만큼이라도 틀려서는 안 될턴디, 뱅갑이 갸 허는 짓껄이가 영 그런네 잉!”

김병갑이 서해훼리호 9주기 위령제에 참석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여수댁은 뒤틀린 심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여수댁은 김병갑과 나이가 같다. 20대부터 친구로 지내 온 사이다.

서해훼리호 참사가 발생하기 한 해 전인 1992년부터 부안에서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내디뎠던 김병갑. 그가 사탕군수라는 애칭을 얻으며 부안군수가 되기까지 위도인들은 많은 힘을 보탰다. 위도 현지 주민은 물론이고 육지에 사는 위도인들도 김병갑의 콘크리트 지지기반이었다.

그런데 김병갑은 1993년 서해훼리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도, 유가족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며 자금을 모아 서해훼리호 위령탑을 세울 때도, 팔짱을 끼고 강 건너 불보듯 지켜만 보았다.

“낼이 아홉 번째 위령젠디 뱅갑이 갸가 위령제에 참석헌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능가?”

여수댁이 조경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수댁은 전남 여수시에 친정을 둔 50대 여성이다. 20대 초반에 위도면 파장금리로 시집을 왔다.

서해훼리호 참사 때 여수댁도 조경신처럼 가족을 잃었다. 그 뒤 위도를 떠났다. 현재 경기도 안산시에서 살고 있다. 급한 집안일 때문에 며칠 전 위도에 들렀다. 떠난지 5년 만의 일이다. 마침 서해훼리호 9주기 위령제가 내일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육지로 나가지 않았다. 내일 위령제에 참석한 뒤, 오후에 막배, 즉 내일 파장금항에서 마지막으로 출항하는 여객선을 타고 육지로 나갈 참이다.

1993년 서해훼리 참사 때, 위도 파장금항과 격포항 사이의 정기 여객선은 하루에 단 한 차례 왕복 운항했다. 항로에 투입된 여객선은 단 한 척 뿐이었다. 그 한 척의 여객선이 바로 서해훼리호였다.

현재 위도 파장금항과 격포항 사이엔 두 척의 여객선이 운항 중이다. 서해훼리호와 달리 차량도 선적할 수 있는 두 척의 카페리호다. 개양훼리호도 그 가운데 한 척이다. 개양훼리호 등 두 척의 카페리호는 위도 파장금항과 격포항 사이의 항로를 1일 몇 차례씩 왕복 운항하고 있다.

“언니 매년 이맘때가 되면 요상허게도 내 몸이 아퍼 부안 벵원에 입원 하는 통에 멫번 위령제에 참가를 못히서 사탕군순지 사탕발림군수지 뱅갑이 아자씨가 위령제에 단 한 번이라도 참갈혔는지 나는 잘 모르것네만 낼 위령제에 참갈 안 헌다는 소릴 들응께 참말로 정냄이가 뚝 떨어지는고만 그려. 군수에 당선 돼가꼬 처음으로 맞는 위령젠께 무신 일이 있어도 참석을 허는 것이 위도 출신 군수의 도리지! 언니, 안긍가? ”

조경신이 김병갑에 대한 비방을 이렇게 늘어놓자 여수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친구인 김병갑에 대한 비방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언니, 오늘 오후 객선서 무신 일이 일어났는지 혹시 알고 있능가?”

조경신의 질문에 여수댁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눈빛이다.

“대리 희오가 말이네, 격포서 막배를 타고 위도로 들오다 바다로 뛰어들어가꼬 큰 난리가 났다는디 그 소문 못 들었냐고?”

금시초문의 충격적인 소식인 듯 여수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암만혀도 낼 위령제에 참갈헐라고 희오가 오늘 객선을 탔던 모양인디 객선이 임수도를 지나 서해훼리호 침몰 해역으로 들어서는디 아 글씨 희오 야가 바다로 뛰어들었다지 뭔가”

(편집자: 작가 서주원 소설 봉기 4권은 본지 편집방향과 전혀 관계 없으며, 부안 출신 서주원씨 작품을 독자들에게 알리는데 의미를 두었음을 알립니다. 서해훼리호 참사 9주기 위령제 ②는 7월 15일자 신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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