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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비와 호벌치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 급부상

기사승인 2020.11.26  21: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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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인터넷신문과 부안人신문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타루비, 호벌치, 민충사 등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부안군지(2015년 간행) 집필에 참가한 관련 전문가들은 1597년 4월 전투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시기와 장소)에서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면 1597년 9월 청등벌 전투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우선 타루비墮淚碑가 언제 어디에 세워졌는지를 고찰해봐야 한다.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현재의 타루비(1981년 건립, 변산문화협회 주관)에는 "전란이 끝난 뒤 고을에서는 한날한시에 순절하신 그 혼과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여 타루비를 세웠던 것이다"라며 추정했다.

함평 이씨 후손들이 1597년 9월 전투를 기록한 도곡실기桃谷實記에는 고예진이 타루비 글을 지은 것으로 나와있다. 부안군지 4권에도 고예진의 타루비를 원문 그대로 소개하고 있지만 비석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는다.

1950년대 도곡 선생 후손 취헌 이안범, 오재 이창환(부안 백산)은 동문수학했던 간재 문인들에게 도곡 이유와 낭곡 이억영에 대한 비문을 부탁했다. 도곡실기에 있는 타루비 작성자는 고예진으로 적혀 있다. 고예진은 타루비에 부안현지, 호남절의록, 전해져 오는 이야기 등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은 호벌치에 대한 이름이 언제부터 불렸는지 찾아야 한다. 1942년 간재 문인 수양 오진영은 도곡 이유 묘갈명에서 "扶安縣誌에는 오랑캐 놈들을 물러나게 한 고개라는 뜻으로 호벌치라는 지명이 전하고 있으며, 선조 임금님 시절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도곡 처사 이공이 의병을 모아 왜적을 쫓아낸 곳이다"라며 호벌치라고 불리운 시기를 적시하고 있다.

특히 야수실기野叟實記(의병장 채홍국과 의병들의 1597년 4월 전투 기록)를 지지한다는 부안향교 유장儒狀(1923년 작성)에서도 "왜적을 장등長嶝에서 토벌하고 연달아 상략치上掠峙에서 격파하는데"라며, "후인들이 그 고개의 이름을 호벌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볼 때, 1597년 9월 도곡 이유가 참전한 청등벌 전투 이후 호벌치라는 지명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이 형성된다.

도곡실기에 나와 있는 고예진의 타루비 실체 규명과 야수실기에 나와 있는 1597년 4월 전투 장소인 장등長嶝과 상략치上掠峙 위치가 어디인지 반드시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부안현에 왜적이 침입하자 현감과 관군들이 도망간 자리를 의병들이 목숨으로 지켜낸 충절忠節을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할 중요한 과제가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

'야수실기'를 지지한다는 부안향교 유장에 장등과 상략치가 나오며, 후에 사람들이 그 고개를 호벌치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출처:야수실기)
고예진이 지은 타루비문(출처:도곡실기)
묘갈명에 나오는 호벌치에 대한 설명(출처:도곡실기)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

<저작권자 © 부안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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