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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부안을 찾아온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자 간재 전우 선생

기사승인 2019.10.14  19: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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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100년 전 부안을 찾은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변산 제법성지
②100년 전 부안을 찾아온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자 간재 전우 선생

1200년대(고려말) 성리학을 부안에 뿌리내린 지포 김구
1912년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자 간재 전우...제자 3,000명 배출
민선 7기 군정 과제, ”간재 문집 정본화 사업, 도동서원 복원“

부안군 계화면 양지마을 계양사 입구. 간재 선생 문하생은 3000여 명이며 이곳에 수십 동의 숙소가 있었고 마을 이름도 학자촌으로 불렸다고 한다.

 1200년대 고려 외교관 지포 김구는 성리학을 들고 고향 부안을 찾아와 부안읍 선은동과 변산면 지지포에 집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지포 김구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유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43년 후학들은 지포 선생의 유지를 받들며 부안읍 연곡리에 도동서원을 짓고 선생을 배향하게 된다.

특히 간재 선생은 지포 김구의 과거 행적을 찾아내 지포 선생을 칭송하는 비문 ‘지포 김구 유허비’는 현재 석정 문학관 뒤편 부안읍 선은동에 있다.

1912년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자 간재 전우는 일제 탄압으로부터 성리학을 지키기 위해 부안을 찾게 된다.

성리학은 부안에서 뿌리를 내렸고, 부안에서 열매를 맺은 곳이며 우리나라 인문학 집대성 고장이다.

[부안人 간재 선생 이야기]

부안군 홈페이지에서 부안인물 ‘간재’는 “1841년(헌종 7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14세에 한양으로 이사를 가게되고 20세에 퇴계문집을 보며 성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기호학파인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문으로 들어간다.

간재는 철저히 율곡 학설을 옹호하며 우암 학설을 지지했다. 1905년에 이른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일본에 의하여 강압으로 맺어지자 바로 그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이 그의 상소로 그 조약이 철회될 수는 없는 처지인지라 눈물을 머금고 스스로 한탄하며 “공자는 이런 시대를 당하면 바다로 떠나갈 것이다 하였으니 나는 바다로 가겠다.”하고 왕등도, 고군산도, 계화도로 들어가 후진 양성에만 전념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1910년 무렵 간재 선생은 부안군 계화도 양지마을에 정착하여 제자 3,000여 명을 배출하였으며, 1922년 향년 82세로 별세한다. 1933년 제자들은 부안군 계화면에 계양사를 지어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간재집은 총 59권 30책으로 간행되었다.

[부안人 성리학 이야기]

조선조 성종 때 발간한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시를 지역별로 분류해보면 전북에서 부안이 1위를 차지한다. 부안은 물산이 풍부하여 ‘생거부안’으로 일컬어졌으며, 명승名勝 또한 뛰어나 많은 문인소객들이 유람하며 주옥같은 시문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부안지역의 성리학 연원을 고찰해보면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문정공 지포 김구 선생이 고려말 성리학을 수용하였으며, 고향을 찾아 부안에서 후학들을 양성한 바 있다. 간재 선생은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자로 1910년경 부안 계화도에서 30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며 조선 유학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로 본다면 부안은 성리학의 발흥과 결국(結局)의 지역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오늘날 간재 선생은 주자학을 정확히 이해한 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 초기는 주자성리학의 정착기이며, 중기는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조선성리학이 꽃을 피운 시기이며, 조선 후기와 말기는 실학사상이 팽배해지는 가운데 성리학이 더욱 심화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부안人 간재 선생이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자로서 성즉리(性卽理)설을 주장하며, 영남의 한주학파(한주 이진상)가 주장하는 심즉리(心卽理)설을 정면으로 반박함으로써 조선성리학의 최후 논쟁인 심설논쟁으로 심화발전한 것은 한국유학사의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학술논쟁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크게 네 개의 논쟁으로 귀결할 수 있다. 16세기 퇴계-율곡의 사단칠정론, 17세기 송시열의 예송논쟁, 18세기 권상하의 문인 이간-한원진이 벌인 인물성동이논쟁(호락논쟁), 19세기 간재학파와 한주학파-화서학파간의 심설논쟁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조선 성리학 마지막 논쟁인 심설논쟁은 부안人 간재선생이 주도했다.

[성리학의 시대적 부침浮沈에 따른 간재학파 역할은...]

성리학은 조선조 마지막까지 치열한 논쟁을 거치면서 학문적 수준을 높였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어쩔 수 없이 신학문과 겨루기를 치러야만 했다.

김제 출신으로 간재 선생의 문하에 들었다가 신학문으로 전환하여 서울 중동 중학교와 일본(동경사범) 유학을 다녀온 운재芸齋 윤제술尹濟述은 남성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광복 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6선(김제와 서울 서대문구) 국회의원으로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바 있다. 동진강 나루터를 건너 간재 문하의 안내로 계화도의 간재 선생을 찾아뵙고 그의 문하에 들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간재 선생 제자 윤제술 전 국회부의장은 시대적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신학문을 배웠지만 간재 선생 제자임을 망각하지 않고 일생 동안 선비로서 곧은 절개와 성품을 끝까지 지킨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국회의원 6선 임기 내내 교육위 소속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헌신하였다. 이외에도 간재 문하에서 정,관계와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 많았다. 시대적 격변기에 간재의 학문과 사상이 현대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제술 전 국회부의장 부인은 강암 송성용 선생의 사촌(宋二順)으로 알려져 있다. 여산 송씨와의 인연은 현대사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20세기 한국 서단의 거목으로 일컬어지는 강암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과 단발을 거부하고 일생 동안 한복 차림으로 보발을 하고 갓을 쓰며 전통적인 선비의 생활을 고수하였다.

간재와 윤제술의 사승관계, 그리고 윤제술과 여산 송씨와의 혼인 관계는 전통과 현대라는 시대적 격변기에 놓여 있다. 일찍이 서예를 수련했던 운재 윤제술과 강암 송성용의 관계는 오늘날 전북문화의 중심축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강암 선생이 덕진공원 안에 있는 간재선생유허비를 쓴 것과 간재사상연구회장을 역임한 것은 간재선생의 학맥이 운재를 거처 강암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1950년대 K 대학 모 총장은 유학사를 정리하면서 간재를 ‘부유(腐儒)’라고 혹평했지만, 최근 간재 학문과 학파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그의 학문과 사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조선 마지막 성리학자 부안人 간재가 남긴 숙제는...]

간재 선생은 생전에 간재사고(艮齋私稿)라는 자서를 붙여 문집을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일제로부터 검열을 받아 문집을 발행하지 말 것을 유언했지만, 사후 일부 제자들은 선생의 문집을 서둘러 출간하였다. 이것을 진주본(晋州本, 1927)이라 한다.

이후 전주의 금재 최병심(崔秉心)등이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것을 신도본(新都本)이라 한다. 또 1929년 중국 상해에서 별집을 발간하고 추담별집(秋潭別集)이라 이름하였다. 1975년에는 화도본(華島本) 전우전집이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 되었고, 1984년에는 보경문화사에서 간재 전집이 축쇄영인 되었다. 이로써 간재 문집은 여러 판본이 존재하게 되었다.

간재학회에 운재 윤제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는 부안 출신 이은혁 교수(문학박사)는 부안군이 향후 해야 할 간재 학술사업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간재 문집의 정본화 사업“이라고 지적했다.

여러 판본을 정밀하게 대조하고 교감하여 정본을 확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후 확정된 문집을 토대로 국역을 진행하여 학문과 사상을 널리 선양해야 한다. 간재 문집은 내용이 깊고 범위가 방대하여 사계 전문가의 국역이 절실하다.

수년 전부터 전북대(간재학연구소)에서 간재문집을 국역하고 있지만 지지부진할 뿐만 아니라, 정본화 작업이 선행되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 관련 학계에서는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안군이 해야 할 일]

지포 김구에서 시작하여 간재 전우 선생이 대미를 장식한 성리학에 대해 지난 100년 동안 부안군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부안군 계화면 계양사에서 동쪽 방향에 2008년 간재 선생 추모회 화연회에서 세운 지주중류백세청풍(砥柱中流百世淸風) 청풍대비만 우뚝 서 있다.

간재 선생 추모회 화연회에서 세운 청풍대비

순창군 훈몽재는 조선조 하서 김인후 선생이 강학을 했던 곳으로 순창군은 2009년 이곳을 중건하여 매년 많은 학생들이 찾고 있다.

간재 선생 유적은 전북 부안군 계화면 양지마을에 있다. 안내판이 별로 없으므로 네비게이션을 켜고 찾아가야만 쉽게 다가갈 수 있다.

고려말에 성리학을 들고 부안에 찾아온 지포 김구와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의 대미를 장식한 간재 선생은 부안의 자랑거리이다.

문정공 지포 김구 선생을 배향한 도동서원 복원과 100년 전 간재 선생이 후학 3,000여 명을 배출한 부안군 계화면 계양사 주변 복원 사업 그리고 간재 문집 정본화 사업까지 맡아 책임을 져야 한다.

‘성리학 본향’ 부안군!!

 

조봉오 기자 bismark789

<저작권자 © 부안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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