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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명공주와 백제부흥운동 발자취

기사승인 2019.01.26  21: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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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명, 그대도 이 달을 보고 있겠죠? 저녁마다 달이 뜨는 것은 그대를 잊지 못해 나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소. 오늘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너무도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고 싶소. 사랑하오. 이승에서 하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 두 갑절 갚아드리겠소. 보고싶소.(이상훈 장편소설 ‘제명공주’에서)

부안군립도서관 자료실에서 여러번 무심히 지나친 ‘제명공주’를 연장해 가면서 두 번이나 읽었다.

이장훈 장편소설 ‘제명공주’는 백제 의자왕과 왜국 제명왕(=고교쿠, 사이메이 왕) 슬픈 사랑 이야기를 테마로 잡고 있다.

청소년들이 읽어보면 남녀간의 사랑을 감성적으로 다가 갈 수 있을 것 같아 권장하고 싶다.

부안군은 주류성에 관한 백제부흥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하고 있어서 제명공주에 대한 소설이 더욱 흥미로웠다.

부안군 주류산성은 백제부흥운동 본거지로 유명하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위태롭다는 소식을 들은 제명왕은 당시 왜국에 와있던 왕자 부여풍에게 군사 6000을 내줘 백제를 돕게 한다.

백제부흥운동 본거지로 삼았던 곳은 부안군 상서면 주류산성 이다. 왜국은 제명왕과 아들 중대형(의자왕 아들, 천지왕)이 수도를 규슈로 옮겨가며 백제구원병 5만명을 양성하고 있었기에 왜국으로부터 백제구원병이 적기에 오면 백제부흥운동은 성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왜국 제명왕은 사랑하는 사람 의자왕이 흑치상지와 웅진성주 예식의 배반으로 생포되어 당나라로 끌려갔다가 자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

제명왕은 661.8월 출병을 하루 앞두고 ‘이제는 영원히 당신을 놓치지 않겠어요.’ 라며 편안히 눈을 감았다. 471(페이지)

이러한 연유로 백제구원병은 당초 출발일보다 1년 넘게 지체되어 왜국을 출발하였으며, 왜국구원병이 백강구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흑치상지는 당나라 유인궤 장군에게 왜국의 백제구원 상황을 밀고하여 백강구전투(지금의 동진강)에서 불화살 공격으로 대부분 사망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부안군에 남아있는 주류산성, 백강전투 등 백제부흥운동 역사 이다.

다음은 등장인물과 백제멸망 1등 공신 흑치상지에 대한 소설 속 기록을 정리했다.

개로왕-곤지왕-동성왕(장남)-무령왕(차남)-성왕-위덕왕-아좌태자(1남), 임성태자(2남)- 아좌태자 장남 ‘부여장’이 임성태자 양자로 입적하였고 그가 훗날 무왕이 된다.

임성태자 아들 ‘부여의광’이 낳은 자식이 제명왕 이다.

599년 소가노 우마코(소가 대신) 막내딸(소가노 하나히메)와 아좌태자 아들 부여광(무왕)이 혼인하여 태어난 아들이 ‘부여 의자’ 이다.99(페이지)

백제 무왕과 떨어져 있던 왜국 부인 소가노 하나히메는 32세로 한을 품은채 아들 부여 의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 184

622년 2월 쇼토쿠 태자가 48세 젊은 나이로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7년뒤 628년 스이코 천황이 후사가 없이 죽자, 소가 대신을 등에 없은 임성태자가 아들 ‘부여명’을 왜국 34대 조메이 왕(다무라 황자)이 됨 168

따라서 임성태자 아들(양자, 부여장) 무왕은 백제 왕, 부여명은 왜국 왕이 되었다.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왕이 형제 왕이 된것처럼, 90년후 부여장과 부여명 형제가 백제와 왜 왕이 된다.189

그리고 백제 무왕과 왜국 조메이왕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다. 234

629년 백제 무왕은 의자(부여의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백제로 오라고 한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 제명공주는 이별을 슬퍼하며 직접 지은 버선을 선물하고 밤을 같이 보냈다. 몇 달후 제명공주에게 태기가 있었다.

백제로 건너간 태자 의자는 사택왕후와 정략 결혼을 하고 열흘 뒤 왜국에서는 제명공주가 조메이왕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202

의자가 백제왕이 되고 난후 왜국 제명공주를 보고 싶을 때 왜국을 바라 본 곳이 向日庵 이다. 203

642년 제명은 의자가 백제왕에 오른지 1년후에 왜 35대 왕(고교쿠, 사이메이 왕 천황)에 오른다.236

백제 의자왕과 왜국 제명왕은 비슷한 시기에 왕이 되고, 죽음도 같은 시기에 맞이한다.

▲제명공주- 일본 35대(고교쿠 왕), 37대(사이메이 왕)

(일본서기에는 제명왕은 곤지왕 손자인 비다쓰 왕의 후손이자 조메이 왕의 왕비였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10p) 위덕왕의 아들 임성태자 손녀가 제명왕(11p)

▲백제 무왕- 아좌태자 큰아들로 작은아버지 임성태자 양자로 입적되었다. 무왕은 일본에서 성장했으며, 무왕 아들 의자왕도 제명과 함께 어릴 때 임성태자 집에서 자랐다.12p

흑치상지 백제 배반과 제명왕의 백제구원병 모집

660년 6월 소정방은13만 병력을 이끌고 산둥반도 성산을 출발하여 덕적도에 닿는다.

의자는 흑치상지에게 전세를 물어보니 흑치상지는 거짓말로 꾸며 보고한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치러 간다는 것이라고..

그러나 계백은 해로를 따라 올라오는 당군을 불화살로 막아야 된다고 했으나 의자왕은 흑치상지 주장을 받아 들여 신라군 접전지로 군사를 보낸다.374

기벌포를 향해 올라 오는 당군에 대해 의장왕은 신라군과 접전을 하고 있는 백제군 2만을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흑치상지는 구원병을 모아오겠다며 차일 피일 미루었다.375

의자왕은 계백에게 군사 5000명 주며 흑치상지가 지방에서 구원병을 이끌고 올때까지 일주일만 버텨보라고 한다.375

흑치상지는 구원병을 황산벌에 보내지 않았다.

의자왕은 부소산성이 당군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보고 웅진성(성주 예식)으로 옮겨 왜와 고구려에서 원군이 올때까지 몇 달 버티면 된다고 판단했다.

웅진성으로 흑치상지가 찾아온다. 의자왕은 그간 소행이 괘씸했지만 구원병을 데리고 왔기에 반갑게 맞이한다.376

그러나 흑치상지는 660.7.18 웅진성주 예식을 꾀어 의장왕을 생포하게 된다.

조선상고사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은 곰나루성으로 달아나 성을 지키는데 수성대장(守城大將)이 곧 임자(任子)의 무리가 왕을 잡아 항복하려고 하였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동맥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태자 효(孝)와 소자 연(演)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의 진영으로 묶여갔다.]

당군의 백제 침략 소식을 들은 제명왕은 당시 왜를 방문한 부여풍에게 군사 군사 6천명이끌고 백제로 갈 것을 명한다.387

660.12월 부여풍이 왜 지원군 6000명을 데리고 웅진성에 도착했을때 이미 의장왕은 생포되어 당나라로 갔었다. 곧바로 제명왕에게 보고 했다.441

제명은 수도를 백제와 가까운 규슈지방 쓰꾸시로 옮기고 20만명의 군대와 주민들도 같이 이동했다. 448

왜는 제명왕이 죽은 후에 1년상을 치르고 백제 구원병을 보내기로 했다. 이러한 이유로 백제부흥운동 맥이 끊겨 버렸다.

흑치상지는 백제부흥운동 본거지인 임존성을 무너뜨려 백제부흥운동 멸망 1등공신이 되어 당나라로부터 절충도위라는 벼슬을 받는다.482 삼국사기에는 흑치상지가 백제를 구한 영웅으로 나온다.

흑치상지는 당군 유인궤에게 왜군 진입을 다음과 같이 밀고 한다. [백촌강 주변에 매복한 백제병사가 밤에 횃불을 들면 왜군이 그 횃불을 보고 상륙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를 놓치지 말고 불화살로 집중 공격함으로써 적들을 섬멸할 수 있습니다.]512

제명왕(출처:네이버 지식백과 화면 캡쳐)

조봉오 시민기자 bismark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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