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3년 李花中仙, '추월만정秋月滿庭으로 조선 최고 여류 명창 등극
《부안문화원(원장 김영렬) 2023년 발간 '김옥진 육자배기(유영대·유민형 著)'에는 부안 매창이뜸에 모셔져 있는 名唱 李中仙 그리고 언니 名唱 李花中仙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 있습니다. 名唱 李中仙이 부안사람들에게 남긴 유언에 32세 꽃다운 나이에 이승을 하직한 아픔이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모든 내용은 부안문화원 허락을 득하고 독자들을 위해 名唱 李花中仙, 李中仙, 玉寶 金玉眞을 올립니다.//편집자》
名唱 李花中仙
이화중선은 일제강점기 때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은 스타 소리꾼으로서 남긴 음반도 많다. 이화중선의 출생에 관해서는 부산 동래구 출신설과 전남 목포설이 대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화중선의 호적에 1899년 9월 16일 전남 목포시 남교동 12번지에서 아버지 이춘실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2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 기록을 믿기로 한다.
이화중선이 출생했다는 곳이 목포 기생들의 학습소였던 권번 자리였다. 이하중선의 아버지는 갓이나 망건 등을 고치며 떠돌아다녔고, 어머니는 권번에서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이화중선은 아래로 이중선·이화성·이화봉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이화중선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전남 낙안군 벌교면 장좌리로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열세 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장좌리 장터에 가설무대가 있었는데, 이화중선은 어려서부터 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해서 천재 꼬마 명창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화증선은 열세 살 무렵 남원으로 이사하여 권번의 기생이 되었다. 이화증선과 수지면 호곡시 홈실에 살던 박해창과의 일화가 유명하다. 정노식이 지은 조선창극사에는 이화중선이 홈실 박 씨 문중으로 시집갔다가, 협률사 공연을 보고 가출하여 소리를 배워 소리꾼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화중선에게 처음 소리를 가르쳐 줬다고 알려진 사람은 장득주다.
이화중선은 장득주에게 소리를 배우려고 장득주의 동생인 장득진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장득주와 장득진은 순창군 적성면 운림리 사람으로, 남원 수지면 장국리로 이사 와서 살았다. 이들 형제는 조선 후기 순창이 배출한 명창 장재백의 조카들이다.
이화중선이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24살 때인 1923년이었다. 이 해 경복궁에서 개최된 판소리대회에서 이화중선은 '추월만정秋月滿庭'을 불러 조선 최고의 여류 명창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추월만정은 뜰에 가을 달빛이 가득하다는 뜻으로, 심청가에서 황후가 된 심청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대목이다. 추월만정은 이화중선의 최고 히트곡이 되었고, 임방울의 '쑥대머리'에 비견되기까지 한 판소리 사상 최고 인기곡이었다. 김옥진은 이 무렵 이화중선과 이중선 등을 만나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김옥진도 이 대목을 심황후사친가沈皇后事親歌라는 이름으로 출반하였다.
이화중선과 김옥진은 협률사를 통해 활동하였다. 앞에서 말한 대로 협률사는 전국 곳곳을 다니며 가설무대를 설치하여 극장 공연을 하던 전통예술 단체이다.
당시 판소리 공연은 김창환·송만갑·김채만 등 명창이 이끄는 협률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법률사 공연에서 이화중선의 인기는 대단했고,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는 신화도 전해 온다. <사진 11>은 순천 한량 이영민李榮珉이 이화중선을 기리는 관극시를 지어 그녀 옆에 두고 찍은 작품이다.
출처:2023년 부안문화원, 유영대·유민형 著 '김옥진 육자배기' |
이화중선은 격정적인 감정의 노래보다는 차분하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노래를 잘 불렀다. 농현을 심하게 하지 않아서 처음 들을 때는 '히마리 없는' 소리로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힘을 빼고 부르는 소리가 오히려 관객에게는 더 살갑게 다가가는 법이다.
이화중선과 이중선 자매가 부른 '육자배기'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며 눈물을 쏟게 했다고 한다. 이중선도 언니와 마찬가지로 천부적인 성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리 역시 자연스러웠다.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게 소리가 술술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제강점기, 협률사와 창극단의 무대는 중국의 만주까지, 그리고 일본까지도 확장되었다. 당시 일본은 가장 큰 시장이었다. 1943년, 이화중선이 속했던 대동가극단이 도일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일본으로 떠났다.
하나는 일본 레코드 회사에서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음반을 취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징 용당해 일본 각지의 군수품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노무자를 위한 위문 공연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들 일행은 규슈의 노무라, 야하다 지역에서 공연을 마치고 오사카로 가려고 연락선을 탔다. 위문대라고 했지만 이들에 대한 출연료 격의 보수는 없었고, 여비와 숙식비 정도가 지불되었다. 이 무렵 이화중선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 일정이 겹치자 피로가 쌓이고 먹는 것도 부실하여 영양실조로 병세가 날로 악화되었다. 당시 일행인 임방울과 안영환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화중선은 병에 시달리며 비탄에 잠겨 늘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고 한다.
배가 일본의 세토나이카이를 지날 무렵 연락선 2등실에 누워 있던 이화중선은 아무도 모르게 갑판으로 올라가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때 나이 44세였다. 식민지 조선의 천재 소리꾼이 이렇게 사라졌다.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