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부안을 찾은 원효.. 무엇을 남겼나(1)

기사승인 2024.08.07  17:19:49

공유
default_news_ad2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부안 주류성에는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했다.

663년 8월 27일~28일 백제군-왜군 연합군은 백강전투에서 패배하고, 부안 주류성 부흥군들도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백제부흥운동으로 부안에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느 기록에는 "전쟁의 여파로 집집마다 파괴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라는 참담한 당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살아남은 백제유민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자, 신라 고승 원효와 의상이 부안에 와서 백제유민들을 선무했다.

원효와 의상은 676년 개암사 대웅전을 중창하고 원효의 설법을 듣는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열었다. 원효가 머물렀던 곳이 울금바위에 있는 원효굴, 원효방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의 화쟁 사상이 부안 민초(백제 유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주수완 우석대 교수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부안의 원효방은 원효대사가 수행했던 일종의 석굴사원이며, 그 안에는 샘물을 갖추고 있어 사포성인이 가져온 차를 달여마실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부안 원효방에서 원효와 차의 관계가 확인되는 것은 부안이 지니는 해상교역로상의 이점이 그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사포성인을 통해 차를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 원효는 이를 무애차(중생 치료) 개념으로 발전시켜 나갔던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2020년 11월 4일 부안 차 문화 가치 재조명 학술대회에서 부안 차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햇다.

"부안 차 역사는 서기 663년 백제 멸망 후 원효와 의상이 부안을 방문한 시점에서 출발하며, 고려 시대 부안고려청자 부흥기에 차도구 등이 생산되어 왕실까지 공납되었고, 조선 전기까지 부안에서 차를 나라에 공납했으며, 18세기 후반 부안 현감 이운해李運海가 지은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에 등장하는 차와 차도구 등이 진즉부터 부안고려청자에서 만들어 졌다는 점에서 부안은 차 문화의 고장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원효가 부안에 남긴 것은 백제 유민들을 품은 자비와 화쟁이었으며, 남긴 흔적은 부안 차라고 말할 수 있다.

개암사 뒤 울금바위 원효방에서 원효는 사포성인이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물로 끓여 주는 차를 맛있게 음미했다.

부안 차=원효, 사포성인, 원효방, 부안상감청자, 부풍향차보로 이어지는 고급스러움에 큰 매력을 느낀다.

한편, 부안은 해상교역로(변산면 죽막동제사 유적지) 중심이어서 차 문화가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에서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제공-부안청자박물관 한정화 학예사
자료 제공-부안청자박물관 한정화 학예사

 

자료 제공-부안청자박물관 한정화 학예사
자료 제공-부안청자박물관 한정화 학예사
원효방(출처:현대불교)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

<저작권자 © 부안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