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공립농업학교(현 전주생명과학고)는 1910년 5월 전주군 전주면 서정에서 공립전주농림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11년 11월 전주공립농업학교로 개명했다. 1912년 10월 전주군 이동면 노송리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43년에 현재의 위치인 인후동으로 옮겼다.(출처: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홈페이지(국내항일운동사적지)에 소개된 전주공립농업학교는 전주병무청 지역으로 현재는 학교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21년 11월 전주농업학교 1년 생도 전부 퇴학 건은 조선총독부(학무) 기록문에 남아 있지만, 당시 신문 보도는 전주농업학교 학생들의 항일 운동정신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전주농업학교 학생들의 항일 운동은 후배들에게 계속 전파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공적에 비해 독립유공자 등록은 대부분 되지 않았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신문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21년 5월, 전주 헌곡제獻穀祭에 있는 신사 참배를 다녀왔으나 학생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던지 훈도의 지시를 어기고 해산했다.
1921년 10월, 전주농업학교에는 조선인 정규반 학생과 일본인 강습생이 함께 공부를 했으나 평소 일본인 강습생들이 조선인을 경멸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아, 조선인 학생들은 회의를 열고 당사자를 징계하고자 일본인 강습생 出雲春三을 호출했으나 오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조선인 조선인 학생들은 出雲春三을 이불로 둘러씌워 때렸다. 出雲春三은 상해진단서를 첨부하여 전주경찰서에 고소를 했고,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심리한 결과 2년 급장 최기한(崔基瀚)은 징역 6개월에 1개년동안 집행유예의 처분을 받고, 그외 홍순철(洪淳喆) 외 10명은 각각 3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였다.
이 말을 들은 2학년 생도들은 집단으로 동맹퇴학을 단행했으며, 1학년 생도들도 같이 동참했다.
이 사건은 일본 동경에 유학중인 전주농업학교 졸업생들까지 참전하였다. 졸업생들은 도지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결의한 선언서를 인쇄하여 학교당국, 전북도청, 전북 각 공립보통학교와 교육관계자와 각 졸업생들에게 보냈다.
졸업생들의 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의
1. 최기한(崔基瀚) 외 11명 급(及) 출운춘삼(出雲春三)의 행위는 불온당하다 인(認) 함.
2. 현 교원 제씨는 속히 자결(自決)하여 책임을 밝게할 사(事)를 망(望)함.
3. 현 생도 제씨는 속히 등교할 사(事)를 권함.
임술 2월 11일
재일본 동경, 전주공립농업학교졸업생대회(동경)
출처:국가보훈부, 매일신보 1921.11.22 |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