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성황산에 있는 현감 선정비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다.
1553년 6월~1619년 8월까지(기간 66년) 44명의 부안 현감이 재직했지만, 이중 29명이 파면당했다.
특히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있었던 1584년~1602년까지는 현감 18명 모두 연이어 파면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당연히 정유재란 당시 부안 현감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특히 박일헌 군수는 1906년~1914년 대한제국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부안군수를 역임했다. 함북 명천 출신인 박 군수에 대한 이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96년 경원군수 부임하였으며, 1898년 청나라와 국경 문제가 발생하여 당시 경원 군수인 박일헌이 현지 실태를 조사 보고하는 임무를 받았다.(출처:우리역사넷)
박일헌 군수는 長津郡守 재임 시 공립소학교에 일어학과를 설치했다는 기사(출처:帝國新聞 19000731), 鎭南郡守 재임 시 사립 의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출처:황성신문 1906년 4월 4일), 1907년 부안군수 재임 시 사립 영명학교를 설립했다.(출처: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9일)
박 군수는 인재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과 운영에 관심이 많았다. 박일헌 군수가 사립 영명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지만 대한매일신보(1909.06.09)는 운영이 어려워 중단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지역에 천석-만석 부자들이 있었지만 교육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인근 고창고보는 1919년 설립되어 1922년에 개교했지만 부안군은 20년 늦은 1946년 춘헌 이영일 선생에 의해 부안중, 부안농고, 부안여중 중등교육이 시작되었다.
오죽했으면 부안여고 설립이 '부안군 당면과제'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출처:1957년 발간된 부풍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은 지역 발전을 앞당기는 초석이 된다. 그나마 춘헌 이영일 선생의 헌신적인 기부가 있었기에 지금의 부안 출신 인물이 있다고 봐야 한다.
춘헌 선생에 대한 흔적은 부안 성황산, 부안중학교에 가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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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부풍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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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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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帝國新聞190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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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황성신문 1906년 4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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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9일 |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