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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 교수] 도곡실기桃谷實記 역자서문

기사승인 2022.05.15  22: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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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서문

- 해제를 겸하여 -

도곡실기(桃谷實記)는 조선중기 도곡 이유(李瑜, 1545-1597)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본래 낭곡실기의 부록으로 첨가된 것이라서 분량이 적을뿐 아니라 그 내용도 소략하다.

후손들이 뒤늦게 각종 문헌에 산재한 기록들을 수집하여 편집하였기 때문에 직접 저술한 내용 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문집이나 유고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실기’라는 점을 먼저 상기해야 한다.

문집이 아닌 실기로 편집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유례없는 국가의 재난에서 비롯되었다.

도곡 이유는 자가 덕향(德響), 호는 도곡(桃谷), 본관은 함풍(咸豊:함평) 이다. 죽곡(竹谷) 이장영과 해주오씨 사이의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낭곡(浪谷) 이억영의 후사가 되었다. 도곡 선생은 을사사화가 일어난 해에 태어나 정유재란 때 순국하였으니 파란의 시대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도곡 선생이 태어난 때는 을사사화(1545)가 일어난 해로 사림들이 연이어 화를 당하여 정치적 입지가 크게 위축된 시기였다. 양부인 낭곡 이억영은 이에 앞서 중종 정유년(1537)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입신양명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을사사화를 목도한 뒤 그 뜻을 거두고 세거지였던 전남 나주와 영광을 떠나 부안 능가산(변산)에 은거하였다.

도곡 선생 또한 양부를 따라 부안에 이거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가 수양자(收養子)인지 시양자(侍養子)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영광에서 생장(生長) 했다’는 묘갈 명의 기록으로 보아 시양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유소년기에는 생부 이장영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하다가 어느 시점에 양부 낭곡 이억영이 은거하던 부안 변산으로 옮겨왔고, 이후 낭곡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년이 되어 현감 김수복(金壽福)의 딸 부령(부안) 김씨와 혼인하면서 산수가 아름다운 상서(上西) 도화동 시냇가에 작은 초당(정자라고도 한다)을 짓고 고전을 독서하며 자오하였다. 도곡(桃谷)이라는 자호도 이곳 도화동 계곡에서 유래한 것이다.

도곡 선생의 재세기는 이른바 목릉성세로 불릴 만큼 문운이 융성했던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연이은 사화로 인하여 사림들의 진출이 약화된 시기였다. 이후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급기야 기축옥사(1589)로 이어져 정치사에 참혹한 흔적을 남겼다.

도곡 선생이 산림의 처사로 일관한 것도 이러한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 내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외환까지 닥쳤으니 그야말로 개국 이래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도곡 선생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과 건재 김천일의 의군에게 화살과 화약을 수송해 후원하였고, 정유재란 때 부안에서 분연히 의병을 모아 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니, 부인 김씨도 굴복 하지 않고 따라 순절하였다.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충렬을 이루었지만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였고, 아울러 문운이 융성했던 가장(家藏)의 유고들 또한 소실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정확한 시기는 고증할 수 없지만 이후 거주민들이 그 전적지를 왜퇴치 (倭退峙)・호퇴치(胡退峙)・토왜지(討倭地) 등으로 일컬으며 타루비를 세워 추모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호벌치(胡伐峙)라고 칭한다.

호(胡)는 일반적으로 중국 오랑캐를 일컫는 글자이며, 벌(伐)은 무력으로 정벌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퇴왜치(退倭峙)’라고 하는 것이 사실과 부합하는 표현이다.〔입근유허비에 ‘退倭’라고 보인다.〕그 위치에 대해서도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지만, 애초의 지명을 이처럼 바꾸어 호칭하고 타루비를 세운 것은 의로운 충렬을 기리고자 하는 떳떳한 민심의 발로였다.

선생께서 순국한 후 300년이 넘어선 1908년에야 비로소 본손과 흥덕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충렬의 정포(旌褒)를 위한 사회적 공론화 작업이 제기되었다. 이때부터 낭곡과 도곡 선생에 대한 기록을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성대했던 가문의 유고들은 이미 산일(散逸) 된 지 오래되어 찾을 길이 없었고, 잔존하는 것은 단지 야사나 기관지에 기록되어 있는 단편적인 문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후 또다시 일제강점기에 들어가면서 논의의 불씨는 꺼지고 말았다. 이로써 국가적인 정포는 영영 기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도 부안향교와 흥덕향교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향사해야 한다는 논의는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습한 문편을 토대로 낭곡 이억영과 도곡 이유에 대한 행장과 묘갈명이 지어졌다. 그리고 광복을 맞은 이후 「입근유허비」 「초당유허비」 「공인김씨묘표」 「타루비」 「묘지명」 등이 차례로 지어졌고, 여기에 서문과 발문을 가하여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수습된 문편들은 대부분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지만, 그 행간에 미묘한 차이가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실기의 간행 과정에서 주목되는 사항이 있다. 이 실기를 직접 주관하여 편집한 후손은 창환(昌煥)과 안범(顔範)이다. 두 사람이 발문을 쓴 것도 이 때문이다. 주지하듯 창환과 안범은 간재 전우의 문인이다. 뿐만 아니라 서문을 쓴 성기운, 행장을 지은 권순명, 묘갈명을 지은 오진영, 묘지명과 발문을 지은 이병은, 초당유허비를 지은 유영선, 입근유허비를 지은 송기면, 공인김씨묘표를 지은 김택술이 모두 간재의 문인이다.

타루비문을 찬한 고예진은 화서학파(華西學派) 면암 최익현의 문인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쳤던 전북 고창 출신의 애국지사이며, 낭곡의 묘갈명을 지은 민병승 역시 화서학파 금계 이근원의 문인으로 그 항일정신은 같은 맥락에 있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비록 소략한 실기에 불과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문장의 찬자들은 매우 화려하다. 순국 후 300여 년 만에 조선이 멸망하고, 또다시 치욕스런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난 뒤 195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실기가 석판본으로 간행되었다. 도곡 선생께서 순국하신 해로부터 354년 만이다. 실로 긴 세월이다.

실기가 간행된 후 건립된 경의재의 상량문과 경의재기를 찬한 신사범 (愼思範) 또한 성기운・유영선의 문인으로 간재의 재전제자이다. 아쉬운 점은 그 긴 세월 동안 충렬의 공적이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의로운 충렬에 대해 국가적인 정포가 마땅히 베풀어졌어야 함에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논의된 적조차 없었다. 추측컨대 그것은 기록의 부재에서 기인한 듯하다. 찬자들은 한결같이 이 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 실기에 담긴 문편들은 도곡의 후손 창환과 안범의 주선으로 간재학파의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일부 화서학파의 문인들이 참여하여 도곡 부부의 충렬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따라서 이 작은 실기에는 항일 정신이 주축을 이루는 가운데 충(忠)과 열(烈)이라는 유교적 관념이 행간에 짙게 배어있다. 그러므로 책은 소략하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해 9월 9일, 부안인터넷신문 대표이신 조봉오 선생께서 도곡 선생의 후손 이재문・행욱・희행 씨와 함께 서실을 찾아와 국역을 문의하였다. 조봉오 선생은 근래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도곡 선생의 충렬을 심층 보도하여 사회적 공론화에 앞장서 왔다. 이는 작게는 부안의 인물과 역사를 조명하고, 크게는 위국의 의리에 관한 것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만세에 귀감이 되는 역사적 사실을 널리 전파하는 단초가 되었다.

따라서 국역이 후손의 입장에서는 선조의 위대한 공적을 기리고, 사회적으로는 역사의 귀감을 선양한다는 의미가 있기에 나 역시 일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섰다. 이에 원문의 의미를 살려 국역하되 최대한 상세하게 각주하였다.

이를 토대로 가계도를 그려 서문 뒤에 게재하고, 도곡 선생 연보를 작성하여 권말에 부록하였다. 참고로 국역하면서 채홍국(蔡弘國, 1534-1597)의 사실을 적은 야수실기(野叟實記)와 송흠(宋欽, 1459-1547)의 지지당유고(知止堂遺稿)를 구해 읽어보니 관련된 내용들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또 실기에는 없으나 경의재와 타루비 관련 문장을 국역하여 원전 영인본과 함께 부록으로 실었다. 국역본을 상재(上梓) 하는 올해는 도곡 선생께서 순국하신지 425년이 되는 해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으나, 학식이 일천하여 빚어진 부족함에 대해서는 독자제현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2022년 3월 17일

전주 진북서재에서 이은혁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

<저작권자 © 부안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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